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COVID-19)의 빠른 확산에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한 달 후인 4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코로나19로 촉발된 세계경제 위기를 ‘대봉쇄(Great Lockdown)’로 명명하기에 이른다. 최근에는 사회·경제 모든 분야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포스트코로나(Post Corona)’가 주요 쟁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 세계적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은 빛을 발했다. 감염 초기의 빠른 대처,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구축과 우수한 IT 인프라 활용, 여기에 성숙한 시민의식이 더해진 결과다.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무증상 감염과 지역사회 확산, 겨울철 재유행 등에 대비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19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방역당국의 우려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우리 경제는 어떤 모습일까. 정부는 지난 제5차 비상경제회의(4.22.)에서 ‘한국판 뉴딜’을 제시했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 산업 육성, SOC 디지털화를 골자로 한다. 주목할 것은 뉴딜인데, 1930년대 대공황으로 침체된 미국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추진했던 일련의 정책을 말한다. 이번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한국판 뉴딜을 살펴보기에 앞서 과거 뉴딜의 주요 내용을 짚어보고자 한다.
번영과 광란의 1920년대 미국
20세기 최악의 경제사건으로 평가받는 대공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행된 정책인 뉴딜, 둘의 경제사적 의미와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1920년대 세계정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각축장이었던 유럽은 전후 혼란에 휩싸인 반면, 미국은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특히 1923~1929년은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호황의 시기로, 피츠제럴드(F.Scott Fitzgerald)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1925)의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 경제는 테일러(F.W.Taylor)의 과학적 관리기법, 포드(Ford)社의 컨베이어벨트 생산 방식 등이 도입되면서 대량 생산의 문이 일찌감치 열린 터였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은 그동안 해내지 못했던 수많은 과학적 성과와 기술발전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산업 기반시설이 파괴된 유럽과 달리 미국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기에, 전후 세계경제의 주도권은 자연스레 미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은 점차 높아졌고, 그만큼 기업 활동도 전성기를 맞이한다. 대량 생산은 곧 대량소비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라디오와 영화, 자동차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오늘날 인터넷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라디오는 당시 사회, 정치 등 각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캘리포니아주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던 할리우드(Hollywood)가 미국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모든 가정이 자동차를 보유한다는 게 꿈이 아닌 시절이었다.
그밖에도 금주법 통과(1919), 여성 참정권 도입(1920), 공화당 재집권(1921), KKK(Ku Klux Klan, 미국 극우단체)성장, 재즈(Jazz) 유행 등이 이어졌다. 1920년대 미국은 번영과 광란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그림 1] 포드社 컨베이어벨트 생산 과정
※ 자료 : transportationofthe20thcentury.weebly.com
[그림 2] 1920년대 미국을 그려낸 작품 『위대한 개츠비』(2013)
※ 자료 : 네이버 영화
검은 목요일, 대공황의 시작
발단은 주식시장이었다. 당시 실물경제 호황이 주식시장에 그대로 이어지면서 주가는 꾸준한 상승세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정부의 감세정책, 투기성 대출이 더해지면서 주가는 거품(Bubble)으로 확대되기 시작한다. 비이성적인 과열이 시장을 지배하는 순간에 다다랐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 믿었다. 물론 이 믿음이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9년 10월은 미국 주식시장의 암흑기로 기억되는 시기다.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 불리는 10월 24일, 다우지수가 급락했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증발해버린 투자자들은 망연자실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29일, 주가는 11% 가까이 폭락했다. 1929년 9월 380선을 바라보던 다우지수는 한 달 사이에 230선으로 고꾸라졌다. 대공황이 절정이던 1932년에는 40선까지 추락했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공황 이전 수준을 회복한다.
농산물 가격 하락도 대공황을 촉발시킨 원인으로 지목됐다. 전쟁이 끝나자 군수품과 식량 조달을 평시 수준으로 전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전후복구에 여념이 없던 유럽이 농산물 생산을 재개하면서 미국 농산물은 공급과잉을 맞게 된다. 미국 농업지대의 의원들은 농산물 가격 보호를 위한 관세 부과를 주장했는데, 하필이면 대공황과 맞물리며 교역 위축을 가져온 것이다.
1929년 3% 수준이던 실업률은 1993년에 25%로 급증했다. 수백만 명의 실업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구호품과 자선단체가 지원해주는 한 끼 식사가 전부였다.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이어지면서 은행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소득불평등, 시장경제에 대한 불안감, 인종 차별 등 대공황을 계기로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미국의 여러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버의 몰락과 정권 교체
[그림 3] 대공황 당시 다우지수 추이(※ 매월 말일 기준)
※ 자료 : 한겨레
[그림 4] 증권시장 붕괴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월스트리트에 운집해 있는 모습
※ 자료 : 프레시안
[그림 5] 대공황 당시 미국 시카고의 한 상점에서 무료 수프와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 선 실직자들 모습
※ 자료 : 조선일보
당시 미국 집권당은 공화당이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워런 하딩(W.G.Harding, 1921~1923), 캘빈 쿨리지(J.C.Coolidge, 1923~1929)를 거치는 동안 미국 경제가 호황기였던 이유도 있었고, 대선 후보로 지명 받은 후버(H.C.Hoover) 역시 당시에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풍부한 행정 경험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던 때였다. 그는 192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스미스(A.E.Smith) 후보를 넉넉한 표차로 따돌리며 당선됐다.
후버는 취임사에서 “빈곤에 대한 최후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선언했다. 당시 미국의 경제지표를 보면 분명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불과 취임 반 년 만에 대공황이 발발하면서 그는 궁지에 내몰렸고, 심지어 대공황을 막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난마저 들어야 했다. 후버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다. 지금에야 경제가 어려우면 정부가 나서는 게 정설이지만 당시 미국 경제는 지극히 시장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개입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버 또한 지금의 위기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쳤다.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시장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사태를 감지한 후버는 재정지출 확대를 결정했다. 1932년 재건금융공사(RFC, 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를 설립해 파산위기에 처한 기업, 은행에 초기 5개월간 10억 달러를 자금을 지원했다. 그밖에도 연방토지은행(Federal Land Bank), 주택융자법(Home Lone Act)도입을 통해 수요 증대를 꾀했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소득세율 인상 카드까지 꺼내들었지만 대공황 대응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중에서도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Tariff Act)’은 경기침체를 가중시킨 무역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초 자국 농산물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도입했으나, 법안심의 과정에서 새로운 품목들이 추가되면서 총 2만1,000여 개의 품목이 관세 대상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당장의 효과는 뚜렷했으나, 수출이 줄어든 상대국은 보복관세로 대응했다. 이는 세계 교역량 감소로 이어져, 1929년 84억 달러 수준이던 세계무역액은 1933년 30억 수준에 그쳤다.
[그림 6] 1929~1933년 세계무역액 급감 추이(단위 : 달러)
※ 자료 : 조선일보
후버에 대한 민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던 이들이 임시 거처를 마련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후버빌(Hooverville)’이라 불렀다. 이불을 대신할 신문지는 ‘후버 담요’라고 조롱했다. 인류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될 후버댐(Hoover Dam) 또한 실제로는 후버 재임 시절 계획했던 것인데, 한동안 볼더댐(Boulder Dam)으로 불리는 수모를 겪다 1947년에 이르러서야 후버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림 7] 후버댐 건설 당시 모습
※ 자료 : 삼성물산 건설부문 공식 블로그
루즈벨트 당선과 뉴딜의 시행
어느덧 후버의 임기는 끝을 향해 있었고, 다음 대선이 다가왔다. 후버의 재선에 도전장을 낸 이는 민주당의 루즈벨트(F.D.Roosevelt)였다. 그는 후버와 다른 새로운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실현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미 상원의원과 뉴욕주지사를 지낸 그 역시 결국엔 미국의 상류층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대공황의 혼란 속에 대선이 치러졌고, 미국인들은 루즈벨트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1932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2,282만 표를 얻으며 1,576만 표를 얻은 후버에 압승했다. 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하원 313석, 상원 59석을 얻으며 공화당의 하원 117석, 상원 36석을 여유 있게 따돌린다. 당시 뉴딜이 빠른 속도로 전개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의회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실 루즈벨트는 대선 후보직을 수락한 순간부터 일찌감치 뉴딜을 선언한 터였다. 그는 대공황의 원인을 공급과잉과 구매력 저하, 소득불균형에서 찾았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빠른 대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뉴딜 집행을 위해 정책 자문단(Brain Trust, 정책집단)을 구성했는데, 취임 후 100일간 경제 관련 법안이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루즈벨트 본인의 의지만큼이나 자문단의 역할도 컸다.
뉴딜의 목적은 취임사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루즈벨트는 39세의나이에 찾아온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서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취임사에서 남긴 말은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이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회자되며, 당시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미국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준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림 8] 대공황 당시 미국을 이끌었던 전·현직 대통령의 모습
※ 자료 : 중앙포토
[그림 9]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려진 뉴딜 뱃지
※ 자료 : 위키피디아
전기 뉴딜 – 구제와 회복
뉴딜의 기본 방향은 3R로 요약할 수 있다. 대공황에 따른 실업과 빈곤을 구제하는 일(Relief), 대공황 이전의 경제를 회복시키는 일(Recovery), 대공황이 재발하지 않게끔 제도를 개혁하는 일(Reform)이 그것이다. 우리와 달리 대통령의 중임에 제한이 없는 미국 정치를 고려할 때, 뉴딜 역시 전기와 후기로 나눠볼 수 있다. 전기(1933~1934)의 경우 빈곤 구제와 경기 회복에 중점을 둔 반면 후기(1935~1938)는 제도 개혁을 강조했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정책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긴급은행법
취임 직후인 1933년 3월, 루즈벨트는 긴급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을 제정해 전국 은행의 영업중지명령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 은행의 재정건전성 심사가 이뤄졌다. 은행은 경제의 혈액에 해당하는 만큼 빠른 정상화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사를 마친 은행은 다시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계좌에 돈을 넣었다. 자칫 파산(BankRun)을 불러올 수 있었던 사태가 진정되던순간이었다.
농업조정법
같은 해 5월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AAA) 제정과 함께 농업조정청을 설치했다. 당시 공급과잉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자, 생산량을 통제하고 보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적정 가격을 유지하고자 한 정책이다. 목화, 밀, 옥수수, 담배, 쌀의 경작 면적을 제한했으며 가축의 경우에는 살처분도 이뤄졌다. 농가 소득 보전에는 기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나, 멀쩡한 농작물이 폐기 처분되거나 소작농이 일자리를 잃는 문제점도 있었다.
참고로 1936년, 이 법은 ‘정부가 농민에게 생산을 축소할 헌법적 권한이 없다’며 위헌 판결을 받게 되는데, 이후 정부는 ‘토양 보존과 국내 할당법(Soil Conservation and Domestic Allotment Act)’을 우회적으로 통과시키면서 가격 통제 정책을 계속해나간다.
1933년 은행법
6월에는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던 투기 행위를 규제하는 조치가 시행되는데, 바로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이라 불리는 은행법 도입이다. 카터글래스(Carter Glass) 상원 의원과 헨리 스티걸(Henry B.Steagall) 하원 의원의 이름을 딴 것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업은행은 예금과 대출 중심의 업무인 반면 투자은행은 증권 투자를 통한 수익창출에 제한이 없다. 대공황 당시 주식시장 붐이 일자 은행들도 너나할 것 없이 주식 투자에 나섰는데, 그 결과 막대한 도산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제 은행들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했다. 상업은행은 증권의 발행, 인수가 금지됐고, 투자은행은 일반인으로부터 예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대표적으로 JP모건은 JP모건(상업은행)과 모건스탠리(투자은행)로 분리됐으며, 골드만삭스는 상업은행을 선택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FDIC)가 설립된 것도 이 시기다. 5,000달러까지 예금을 보증해줌으로써 금융제도의 신뢰를 높였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뉴딜의 여러 정책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정식명칭은 TVA(Tennessee Valley Authority)이다. 당시 테네시강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역으로 인근 주민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는 26개의 댐을 건설해 전력을 공급하는 한편 일자리를 만들어 지역경제를 활성화했다. 민간 분야로의 정부 개입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홍수 억제와 토양 침식 방지, 휴양지 관광 등 테네시강 유역 현대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평가다.
[그림 10] 테네시강 댐 공사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모습
※ 자료 : 위키피디아
[그림 11] 공공사업진흥국(WPA)을 통해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 자료 : 위키피디아
전국산업부흥법
당시로서는 반헌법적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책이지만, 지금에 와서 이 법이 갖는 의의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33년 제정된 전국산업부흥법(NIRA,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은 기업 간 지나친 경쟁을 제한해 경제를 안정화시키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무엇보다 근로시간, 최저임금 등 노동자의 고용조건에 관한 규정이 담겼다는 점에서 미국 노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법은 위헌 판결을 받으며 폐기수순을 밟게 되는 듯 보였으나, 후기 뉴딜에서 전국노동관계법으로 확대 입법되기에 이른다.
후기 뉴딜 – 제도 개혁
전기 뉴딜의 신속한 수립과 집행은 미국 경제에 기대감과 동시에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성과를 지적하며 더욱 적극적인 행정을 주문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반미국적인 색채를 비판하며 정책 효과의 의문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뉴딜은 빈곤층과 흑인의 지지를 받은 반면, 상류층과 기업집단으로부터는 비판을 받는 상황이었다.
특히 관련 법안에 대한 연방 법원의 연이은 위헌 판결로 뉴딜은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다. 당시 법원은 ‘입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여 연방헌법의 기본정신인 3권 분립을 위반하고,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내렸다.전기뉴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국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 등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루즈벨트는 정공법으로 법원을 움직이기로 결심한다. 위헌 판결한 법을 대체하는, 그것도 더욱 강력한 권한을 갖는 입법을 요구한 것이었다. 1936년 대선에서 루즈벨트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자, 그의 결심은 현실화된다. 법원은 뉴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기 시작했고, 후기 뉴딜은 보다 진보적인 정책으로 추진되기에 이른다.
전국노동관계법
와그너법(Wagner Act)으로도 알려져 있는 전국노동 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전기 뉴딜에서 위헌 판결을 받은 전국산업부흥법을 대체한 것이다.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부당노동행위제도를 명시한 것이 특징으로, 그동안 기업 내부에서 힘의 논리로 결정되던 노사관계에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일대 전환이 이뤄졌다. 이 법을 기반으로 미국 노동조합은 크게 확대된다. 한편 노동자의 교섭력 강화는 노사 간 충돌을 가져왔고, 1947년에 이르러서는 노동자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 Act)’으로 수정된다.
사회보장법
후기 뉴딜의 핵심으로 알려진 이 법은 명실상부 미국 복지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보수 세력의반발에도 불구하고 실업보험과 노령보험, 공공부조를 명문화한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은 복지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명문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미국에서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확립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보장법 도입에 대한 루즈벨트의 강력한 의지는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진보의기준이다”라는 그의말에서분명하게드러난다.
[그림 12] 1935년 사회보장법안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 자료 : 조선일보
뉴딜 평가
뉴딜에 대한 논란은 여전해,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대공황과 뉴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요약해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뉴딜이 대공황 극복에 기여했는가?’, 다른 하나는 ‘뉴딜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다.
냉정하게 봤을 때 뉴딜이 대공황을 해결한 건 아니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군수산업의 성장이 대공황 탈출을 견인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시장경제의 모순을 시정하고자 했다는 점, 복지제도 도입을 통한 미국 사회 전체의 일대전환을 가져왔다는 데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뉴딜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부의 과감한 개입이다. 뉴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라든지 토목 사업과 같은 재정지출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선다는, 이렇듯 지금에야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조차 대공황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루즈벨트 본인도 ‘공산주의자’ ‘상류층의 배신자’와 같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뉴딜은 파시즘과 군국주의가 휩쓸던 유럽과 달리 시장경제질서와 민주주의를 유지하며 미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둘째, 노동·복지의 권리를 크게 강화했다는 점이다. 대공황이 찾아왔다고 해서 모든 미국인들이 뉴딜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노조 설립이 비교적 자유로운 지금과 달리 당시는 공산주의에 가까운 급진적 행동으로 취급받았으며, 복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 미국은 대공황을 맞이했고, 그 시기에 가장 진보적인 정책들이 대거 추진되었다. 이 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있고 일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미국 사회를 진일보시켰다는 점에서 뉴딜의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셋째, 뉴딜은 미국 정당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다. 한때 노예제도를 찬성하며 KKK 집단을 지지했던 민주당은 말 그대로 ‘백인을 위한 정당’이었다. 오히려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고 흑인의 지지를 받은 것은 링컨(Abraham Lincoln)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공화당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진보적인 목소리들이 점차 반영되기 시작했고, 대공황에 이르러서 두 정당의 색깔은 완전히 뒤바뀐다. 지금도 공화당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를 대표하고 있다. 그밖에도 뉴딜이 전후 세계경제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맺음말 - 한국판 뉴딜 전망
한국판 뉴딜의 핵심은 단연 디지털이다. 코로나19와 그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비대면을 강제했고, 좋든 싫든 우리는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트위터는 무기한 재택근무를 선언했으며, 화상회의 앱 Zoom의 이용자수는 3억 명을 넘어섰다. 포스트코로나 국면을 고려하더라도 디지털 경제는 우리가 반드시 선점해야 할 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일자리이다. 과거 뉴딜이 그랬듯, 지금의 경제위기극복에 있어서도 일자리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을 통한 일자리 창출(비대면·디지털 10만 개를 포함 55만 개)을 공언했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공공일자리는 단기 재정지출에 그칠 수 있으며, 디지털 분야의 고용창출효과 또한 아직까지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자리 창출 효과가 불분명하거나 디지털과 관련 없는 사업이 우후죽순 생겨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판 뉴딜에 기대 섞인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돌이켜보면 김대중 정부부터 시작해 노무현 정부(종합 투자 뉴딜), 이명박 정부(녹색 뉴딜), 박근혜 정부(스마트 뉴딜),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뉴딜을 빌려 쓰지 않은 정부가 없다. 그중 성공한 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정보통신 육성 뉴딜 정도다. 나머지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부족했거나 지극히 결과(수치)에 집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번 한국판 뉴딜도 다르지 않다. 제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들, 분명한 목표 설정과 정책 설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기존 정책의 답습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림 13] 문재인 대통령이 제5차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모습
※ 자료 : 한국대학신문
우드로 윌슨(T.W.Wilson, 1913~1921)이 주창했던 ‘새로운 자유(New Freedom)’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가 내세운 ‘공정한 정책(Square Deal)’, 이를 차용한 말이 뉴딜이다. 그렇다면 한국판 뉴딜은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까. 필자는 ‘디지털’이라는 새로움과 ‘논의’라는 정책을 제시한다. 과거 루즈벨트가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을 약속했듯이, 지금의 한국판 뉴딜은 과감한 디지털 전환과 더불어 그로 인한 사회적 소외가 발생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이해관계자와의 토론과 설득도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판 뉴딜이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길 희망한다.
[그림 14] 한국판 뉴딜 주요 정책
※ 자료 : 기획재정부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출처 및 참고문헌
김두얼, 「1930년대대공황 시기의 국제질서변화」, 『KDI 북한경제리뷰』, 2017년 5월호
「미국의번영과 히스테리적 소비, 마침내 거품과 대공황을 낳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014년 7월호
「WHO, 결국 사상 세 번째 ‘팬데믹’ 선언…“코로나 통제가능”」, 『중앙일보』, 2020.3.12.
「1929년의 경제공황은 무엇인가?」, 『경향신문』, 201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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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경제학부 졸. 네이버 블로그 ‘경제학 산책’을 운영 중이며, 1인 출판사(도서출판 경제21C) 대표이다. 경제이론, 경제 사, 시사경제 등을 주제로 강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알기 쉽게 풀어 쓴 경제학 시리즈』(2016), 『딱 이만큼의 경제 학』(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