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아날로그가 있었다. 우리 세계는 손에 잡히는 물질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물질을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생산하는 기업이 규모의 경제를 통해 산업의 선도 기업이 되었다. 그러다 디지털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이 출현하면서 기존의 균형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1995년 MIT 미디어랩 소장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als Negroponte)는 그의 저서『디지털이다(Being Digital)』에서 유형의 물질1이 아닌 무형의 비트가 이끄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프로세스와 제품들이 기존의 프로세스와 제품들을 뛰어넘는 ‘디지털 골든크로스’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 중 사우디 아람코, 버크셔 해서웨이를 제외한 여덟 개의 기업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는 디지털 엔터프라이즈(Digital Enterprise)이다.
디지털 기술은 무어의 법칙을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며, 세상의 모든 정보를 디지털화했다. 실시간으로 디지털화되는 정보가 생기자 기업은 직감이 아닌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이 가능해졌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몇몇 신산업에서 제한적으로 볼 수 있었던 ‘디지털 골든크로스’는 이제 모든 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 비트가 모든 산업에서 게임의 법칙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과 무관할 것이라 생각했던 엔터테인먼트, 호텔, 금융, 유통과 같은 전통 산업들의 선도 기업들도 디지털 엔터프라이즈와의 경쟁에 밀려 선두를 내주었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치를 주는 제품 및 서비스와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품과 서비스는 데이터를 통해 개선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전거, 체중계와 같이 전자제품이 아닌 것들까지 디지털 디바이스화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기술이 공정 효율화와 신제품 개발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 자체가 디지털로 변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정치·사회 활동의 비대면화, 온라인화가 가속화되자 디지털의 파워는 더욱 강화되었다. 대중들은 온라인 쇼핑,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온라인 교육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의사의 진료까지 온라인화가 진행 중이다. 기업에서는 재택근무, 원격근무가 일반화되고, 공장에서는 무인화, 자동화가 확대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던 모든 것이 디지털과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전환으로 게임의 법칙이 변하면서 더 이상 디지털과 연관되지 않은 제품, 서비스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제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디지털 전환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을 기업과 제품에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게임의 법칙을 바꾸기 어렵다. 기존 기업들이 디지털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다. 게임의 법칙은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산업의 가치사슬을 해체하여 새로운 사업모델을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고객가치와 프로세스,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 때 변화한다. 다시 말해, 기존 기업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제품, 사업 모델, 가치사슬 등 모든 것에 대한 카니발라이제이션(Cannibalization)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디지털 엔터프라이즈가 되기 위해서는 디지털 요소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업모델을 통해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주고, 기존 프로세스의 비효율을 제거하며, 새로운 가치사슬을 만들어야 한다.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산업 지형도
빅데이터, IoT 등과 같은 디지털 요소기술은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디지털 요소기술은 새로운 제품,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디지털 엔터프라이즈가 되기 위해서는 고객가치, 프로세스, 생태계를 변화시켜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디지털 아키텍트 역량이 필수적이다. 디지털 아키텍트 역량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존 패러다임에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사업 모델을 설계하는 역량이다.
자동차 산업의 기존 패러다임을 파괴하고 있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프로덕트 아키텍트(Product Architect)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고객가치, 새로운 프로세스, 새로운 생태계를 보여주는 제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 디지털 전환 시대에 기업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 요건임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기존에 쌓아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개별 산업에서 자리잡고 있던 기존 기업은 디지털 전환의 흐름에 따라가기 어렵다. 반면 처음부터 새로운 비즈니스로 시작하는 스타트업은 다르다. 스타트업은 기존 산업의 게임 법칙과 비즈니스 모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디지털 아키텍트 관점에서 가장 진취적이다. 보유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과감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든다. 게다가 조직이 작고 가벼워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세상에 대응하기 적합하다. 그래서『린 스타트업』의 저자 에릭 리스는 “이제 모든 기업이 스타트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변화하는 게임의 법칙 그 중심에 스타트업이 있다.
스타트업이 바꿔놓은 산업의 예시는 너무도 많다. 특히 금융산업은 디지털 전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산업 중 하나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느끼는 변화는 지금까지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했던 활동들이 온라인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 입출금뿐만 아니라, 통장을 개설하는 업무까지 온라인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오프라인 점포가 사라지고 있고 카카오뱅크, 케이뱅크와 같이 아예 오프라인 점포가 없는 은행도 출현하고 있다. 금융 거래의 형태가 변한 것은 금융산업 변화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기존 금융산업은 여신, 수신, 결제, 증권, 보험, 자산 운용 등 금융 상품에 따라 은행, 카드사, 증권사 등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핀테크를 필두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반의 자동화된 오퍼레이션 플랫폼(앤트파이낸셜, 토스 등)이 등장하며 하나의 통합된 플랫폼에서 다양한 금융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단일화된 플랫폼에서 모든 금융서비스를 원스톱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유통산업 또한 스타트업이 게임의 법칙을 완전히 바꿔놓은 좋은 예시이다. 2000년대 초반 출현하기 시작한 온라인 쇼핑몰들은 책과 같은 제한적인 상품에 한해서만 온라인화에 성공하는 모습이었다. 전통적인 소매업체들은 이와 같은 1세대 디지털 소매 플랫폼(아마존, 인터파크 등)과의 경쟁에서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제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상점의 잘 훈련된 직원들이 고객의 요구사항을 더욱 잘 충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 출현한 소셜커머스 사업모델(쿠팡 등)은 데이터에 기반하여 개별 고객 맞춤형 큐레이션을 통해 상품을 추천하고, 오프라인 상점을 방문하는 것만큼 빠르게 배송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전통적 소매업체뿐만 아니라 유통산업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번거롭게 마트, 백화점에 갈 필요 없이 집에서 클릭 몇 번으로 오프라인 매장보다 더 싼 가격에 필요한 물건을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받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기존 유통산업으로부터 고객들이 발을 돌린 가장 큰 이유이다. 이제는 전자제품, 화장품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배송이 용이했던 제품군뿐만 아니라 유아용품, 신선식품(마켓컬리 등)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 기존 유통기업들의 지위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대표적인 제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도 디지털 전환에 따른 변화로 스타트업이 기존 기업을 뒤흔들고 있는 좋은 사례이다. 기존 자동차 기업들은 부품 생산은 외주를 맡기고 디자인과 마케팅에 힘을 쏟으며 자동차라는 하드웨어 자체 판매에 집중했다. 고객들은 자동차의 브랜드 가치와 멋진 외관, 기계적 성능에 돈을 지불했다.
하지만 테슬라를 필두로 많은 스타트업이 자동차를 소프트웨어 중심의 디지털 디바이스로 정의하면서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 판매 채널도 오프라인 매장이 아닌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했다. 또한 5~7년 주기로 신제품을 출시했던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몇 년 된 모델도 OTA(Over-The-Air)를 통해 모델체인지나 리콜 없이도 지속적으로 성능을 높여주는 새로운 가치를 제공했다.
특히 자율주행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새 차를 구입해야만 더 향상된 자율주행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존의 자동차 제품들에 비해, 온라인 업데이트를 통해 자율주행기술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주는 테슬라의 제품들은 비교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 뛰어난 자율주행 기능을 원하는 고객들은 별도 소프트웨어를 구매하거나 구독할 수도 있다. 자동차 기업이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존 자동차 기업의 경쟁자는 테슬라와 같은 신생 자동차 제조업체뿐만이 아니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공유경제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지만, 자율주행기술이 빠르게 보급되는 현 추세가 계속된다면 자동차가 개인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나를 이동시켜주는 기계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자동차 산업은 소수의 제조업체만이 남아 우버, 그랩 등과 같은 차량 공유 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표준화된 제품만을 생산하는 역할로 산업 구조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의 기존 1세대 스타트업들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며 전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기존 기업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판을 개척한 것이다. 반면 지금의 스타트업은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며 기존의 기업과 직접적인 경쟁을 한다. 스타트업과 기존 기업의 경쟁 끝에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는 경우가 매일같이 늘어나고 있다. 뛰어난 자본력과 산업 생태계에서의 지위를 활용해 진입장벽을 쌓고 경쟁을 차단하던 기존 기업들은, 디지털 전환이 시작된 이후 스타트업이 만든 새로운 게임의 법칙으로 들어와 버렸다.
디지털 전환에 놓인 우리의 미래
최근 우리나라에도 바뀐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을 선도하는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토스를 서비스하는 핀테크 업체인 비바리퍼블리카, 유통산업을 재편하고 있는 쿠팡, 온라인 신선식품 배송 업체인 마켓컬리 등이다. 토스는 은행에 가는 수고를 없앴고, 쿠팡과 마켓컬리는 마트에 가지 않고도 필요한 물건을 집에서 빠르고 쉽게 받아 볼 수 있게 해 우리 생활방식을 크게 바꿨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오랜 시간 선두를 유지하던 기존 금융사들과 유통사들이 조금씩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다른 산업들도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게임의 법칙을 직접 바꾸기보다는 해외 스타트업이 바꾼 게임의 법칙을 따라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패스트팔로워(Fast Follewer) 전략으로 성장해온 시간이 길어 디지털 아키텍트 역량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퍼스트무버(First Mover)의 비즈니스 모델을 국내에 도입하여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기업들은 모두 유니콘 기업이거나 앞으로 유니콘이 될 만한 역량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 외에도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뛰어난 스타트업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시작된 비즈니스를 기반으로 시작한 사업이기 때문에 사업 영역이 대체로 국내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성장의 실링이 크지 않다는 것은 문제이다.
오히려 다른 해외 업체가 국내나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고자 할 때 브라운 필드 투자(Brown Field Investment) 형태로 회수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배달의민족을 서비스하던 우아한형제들이다. 국내 스타트업이 해외로부터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은 빅딜이라는 점에서 매우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우아한형제들이 완전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먼저 성장해서 딜리버리히어로를 인수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는 수출 중심의 제조업에 대한 집중 투자로 글로벌 선도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을 가진 중국이 한국을 추월하기 시작하며 우리나라의 강점이 희석되고 있다. 또한 디지털 전환의 물결로 우리나라는 생존을 위해 더욱더 빠른 구조 전환이 필요해졌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산업 구조를 바꾸는 힘은 스타트업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간 국내 스타트업은 기존 기업이 성장해온 방식과 유사하게 다른 스타트업이 만든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앞선 논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스타트업은 기존 기업보다 뛰어난 디지털 아키텍트 역량을 무기로 산업을 재정의하는 조직이다. 변화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디지털 전환을 이끌 새로운 아이디어를 지닌 퍼스트무버 스타트업이 나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스타트업이 글로벌 유니콘으로 성장한다면, 정체된 기존의 내수 기업에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디지털 전환이 우리나라를 세계 선도 국가로 이끄는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